6.25 노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흘려온 갚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오늘의 명언 포도나무가 봄에 열매를 맺도록 수를 쓴다면그 나무는 가을이 되기 전에 시들어 버린다. 같은 이치로 어렸을 때 시달린 아이는 성숙하기전에 허약하게 시들어 버린다. - J. 루소 - 잊으서는 안되는 6.25 전쟁 글: 靜 派 1950년 6월 25일 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3년 1개월 간 계속된 민족상잔의 6.25 전쟁은 허약하고 빈약한 사회적 기반마저송두리쩨 무너뜨린 대 재앙이었다.민족 지도자 조 만식 선생을 살해케하는 등수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죽이거나 탄압하고광복이 되어 통일된 정부를 세우려는 의도를 결정적으로 허물어 버린 민족의 반역자 김일성 집단!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YAK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 1000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일선에 동시에 투입하였다. 적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일제히 남진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1·6사단은 제105전차여단의 제203전차연대와 제206기계화연대의 지원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해 왔다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활동으로 나타났다. 정부수립 이전인 1946년 9월 서울에서의 철도파업, 10월 대구폭동, 1948년 제주 4·3사태와 그 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을 비롯하여, 1948년 10월 20일 여순반란과 지리산·태백산 및 오대산 일대에서의 빨치산 활동 등으로 남한의 치안은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에 덧붙여 1948년 11월 17일 오대산 부근으로의 북한군의 침투로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남침 전까지 38°선 일대에서도 10여 차례의 북한 공산군에 의한 침투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장세력에 의한 전복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최종적인 수단으로 전면적인 남침으로써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성취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와서격변을 겪지 못한 젊은 세대들, 특히 운동권 연대들은 전교조 집단의 의식화에 현혹이 되어북침이라 우기는 하면 김 정일의 호전적 적화야욕을 깨닫지 못하고반미 운동에 혈안이 되어 촛불 시위를 통해반미구호를 내 세우며 난동으로 공공기물을 파괴하는가 하면한달을 넘게 어린 학생들 앞세우고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헛된구호를 국민의 이름으로라 왜곡하며 외쳐 되고 있는것이다.근대 국가가 형성된 이래 지난 500년간에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쟁이였음을젊은이들에게 바르게 알려 주고 싶은것이다.58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은 호전성을 버리지 않고수없이 지원해 주었던 현금과 물자들을전쟁 준비에 사용하고 있는것이다.죽을때 까지도 그 죄를 회게하지 않고 세습으로 정권을 이어받은 그들이 걸핏하면 민족이라는 이름을 외치며인민의 배고픔을 도외시하고 있다.배고파 탈북하는 수 십만의 인민인탈북자들을 잡아다가 극형으로 위협하는실정을 고발하고저 하고 이에 동조하는 우리나라반체제 집단에 응분의 조처를 내려혼란과 분열의 책동을 막아야 할것이다. 오늘은 6월 25일 6.25사변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6.25 노래로 아침 음악 편지를 대신 합니다 오늘도 차한잔 하시면서 예전 를 잠시 생각 하는 그런날이 되셨으면 합니다 사랑합니다 삶의휴식처 꽃반지사랑 카페
잊으서는 안되는 6.25 전쟁 글: 靜 派 1950년 6월 25일 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3년 1개월 간 계속된 민족상잔의 6.25 전쟁은 허약하고 빈약한 사회적 기반마저송두리쩨 무너뜨린 대 재앙이었다.민족 지도자 조 만식 선생을 살해케하는 등수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죽이거나 탄압하고광복이 되어 통일된 정부를 세우려는 의도를 결정적으로 허물어 버린 민족의 반역자 김일성 집단!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YAK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 1000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일선에 동시에 투입하였다. 적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일제히 남진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1·6사단은 제105전차여단의 제203전차연대와 제206기계화연대의 지원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해 왔다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활동으로 나타났다. 정부수립 이전인 1946년 9월 서울에서의 철도파업, 10월 대구폭동, 1948년 제주 4·3사태와 그 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을 비롯하여, 1948년 10월 20일 여순반란과 지리산·태백산 및 오대산 일대에서의 빨치산 활동 등으로 남한의 치안은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에 덧붙여 1948년 11월 17일 오대산 부근으로의 북한군의 침투로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남침 전까지 38°선 일대에서도 10여 차례의 북한 공산군에 의한 침투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장세력에 의한 전복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최종적인 수단으로 전면적인 남침으로써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성취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와서격변을 겪지 못한 젊은 세대들, 특히 운동권 연대들은 전교조 집단의 의식화에 현혹이 되어북침이라 우기는 하면 김 정일의 호전적 적화야욕을 깨닫지 못하고반미 운동에 혈안이 되어 촛불 시위를 통해반미구호를 내 세우며 난동으로 공공기물을 파괴하는가 하면한달을 넘게 어린 학생들 앞세우고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헛된구호를 국민의 이름으로라 왜곡하며 외쳐 되고 있는것이다.근대 국가가 형성된 이래 지난 500년간에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쟁이였음을젊은이들에게 바르게 알려 주고 싶은것이다.58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은 호전성을 버리지 않고수없이 지원해 주었던 현금과 물자들을전쟁 준비에 사용하고 있는것이다.죽을때 까지도 그 죄를 회게하지 않고 세습으로 정권을 이어받은 그들이 걸핏하면 민족이라는 이름을 외치며인민의 배고픔을 도외시하고 있다.배고파 탈북하는 수 십만의 인민인탈북자들을 잡아다가 극형으로 위협하는실정을 고발하고저 하고 이에 동조하는 우리나라반체제 집단에 응분의 조처를 내려혼란과 분열의 책동을 막아야 할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3년 1개월 간 계속된 민족상잔의 6.25 전쟁은 허약하고 빈약한 사회적 기반마저송두리쩨 무너뜨린 대 재앙이었다.민족 지도자 조 만식 선생을 살해케하는 등수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죽이거나 탄압하고광복이 되어 통일된 정부를 세우려는 의도를 결정적으로 허물어 버린 민족의 반역자 김일성 집단!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YAK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 1000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일선에 동시에 투입하였다. 적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일제히 남진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1·6사단은 제105전차여단의 제203전차연대와 제206기계화연대의 지원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해 왔다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활동으로 나타났다. 정부수립 이전인 1946년 9월 서울에서의 철도파업, 10월 대구폭동, 1948년 제주 4·3사태와 그 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을 비롯하여, 1948년 10월 20일 여순반란과 지리산·태백산 및 오대산 일대에서의 빨치산 활동 등으로 남한의 치안은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에 덧붙여 1948년 11월 17일 오대산 부근으로의 북한군의 침투로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남침 전까지 38°선 일대에서도 10여 차례의 북한 공산군에 의한 침투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장세력에 의한 전복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최종적인 수단으로 전면적인 남침으로써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성취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와서격변을 겪지 못한 젊은 세대들, 특히 운동권 연대들은 전교조 집단의 의식화에 현혹이 되어북침이라 우기는 하면 김 정일의 호전적 적화야욕을 깨닫지 못하고반미 운동에 혈안이 되어 촛불 시위를 통해반미구호를 내 세우며 난동으로 공공기물을 파괴하는가 하면한달을 넘게 어린 학생들 앞세우고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헛된구호를 국민의 이름으로라 왜곡하며 외쳐 되고 있는것이다.근대 국가가 형성된 이래 지난 500년간에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쟁이였음을젊은이들에게 바르게 알려 주고 싶은것이다.58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은 호전성을 버리지 않고수없이 지원해 주었던 현금과 물자들을전쟁 준비에 사용하고 있는것이다.죽을때 까지도 그 죄를 회게하지 않고 세습으로 정권을 이어받은 그들이 걸핏하면 민족이라는 이름을 외치며인민의 배고픔을 도외시하고 있다.배고파 탈북하는 수 십만의 인민인탈북자들을 잡아다가 극형으로 위협하는실정을 고발하고저 하고 이에 동조하는 우리나라반체제 집단에 응분의 조처를 내려혼란과 분열의 책동을 막아야 할것이다.
오늘은 6월 25일 6.25사변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6.25 노래로 아침 음악 편지를 대신 합니다 오늘도 차한잔 하시면서 예전 를 잠시 생각 하는 그런날이 되셨으면 합니다 사랑합니다 삶의휴식처 꽃반지사랑 카페
아늑한집은 언제나 온화하며 언제나방문하여 주시기바랍니다
by 김만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