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출사표♧------------------- 尹奉吉(윤봉길=1908~1932) 의사는충남 예산에서 윤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1운동 후 자퇴하고 독학을 시작했다. 이는 어려서부터 체력이 출중하여 장사가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18세에는 더이상 공부를 가르칠 것이 없다고 스승들이 손을 들었으며 19세에는 야학회를 조직, 불우한 농촌 자제를 가르치고 22세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윤봉길은 어려서부터이웃을 사랑하고, 겨례를 위하는 마음이 남과 다른데가 새로 사들여 읽은 책은 그의 겨례 사랑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30년 2월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만주로 망명 31년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32년 4월 일본천장절을 기하여 일본상해 사변에서 승리한 전승축하회를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여는 것을 알고 이날 오전 11시 윤봉길은 사제폭탄을 몸에 식장에 들어가 식장정면에 명중 폭발시켰다.
이날 중국에 있던 최고급 왜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이 거사로 일본 거류민 단장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최고사령관도 24개의 파편을 맞고 죽었으며 그외에 제3함대 사령관, 제9사단장, 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으며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거사 후 윤봉길은 독립만세를 부르며가다 체포 6.21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즉결되고, 24세로 사형당하였다. 1962년 3.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 미국 거주 딸 의정이 '윤봉길 의사(1908~32)' 자료를 발췌해 보내와 감명 깊은 글들을 사진과함께 게재합니다. (출처:Qing영상문화발전소, 인터넷 백과 등)
※출사표 아래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아래로 드래그해서 보십시오.ymd <출사표中에서>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우리의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 가는 삼천리 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 각오는 별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鐵拳)으로 적(敵)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棺)속에 들어가면 무소용(無所用)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 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 이 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 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유서 中에서>
*생가(충남 예산)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두 아들 앞 유서 中에서>
. *상해 임시정부 청사 사적관 윤 의사 사적전시관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을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어록 中에서>.*묘소(효창공원)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중국 상해 '홍커우' 공원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 일본의 천장절과 승전기념일 행사에 폭탄을 투척.
안타깝게도 매헌 윤봉길 의사의거 현장엔 중국의 문학가 루쉰의 동상...
*거사 기념석
체포장면
**최후 순국 장면
*매장 장면 **장제스 대만 전 총통의 친필
*1967년 윤봉길 의사 유족들에게 전달해준 친필 붓글씨 윤 의사 의거를 계기로독립군은 당시 국민당 장제스 정부의 지원을 받을수 있었는데 장제스는"중국의 백만 군대가 못한 것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 냈다."고 극찬.
백범 김구 선생과 매헌 윤봉길 의사의 후손들이 28일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 현장인 루쉰(옛 훙커우)공원에서 만났다.이날 윤 의사 상하이 의거 75주년 기념식장에서 김구 선생 손자인 김양 주상하이 총영사와 윤 의사의 손자, 손녀인 윤주웅씨와 윤주경씨가 자리를 같이했다.짧은 생을 살다간 윤 의사의 유복자 윤종씨의 아들인 주웅씨는 현대자동차 디자인실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딸 주경씨는 윤 의사 기념사업회 상무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김구 선생은 75년 전인 1932년 4월29일 윤 의사를 훙커우 공원으로 떠나보내면서 짧은 작별인사를 나눴다. “후일 지하에서 다시 만나뵙지요.” 윤 의사는 자동차에서 차창으로 김구 선생을 향해 머리를 숙였고, 자동차는 윤 의사를 싣고 훙커우 공원으로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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