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YCK, Sir Anthony Van
(b. 1599, Antwerpen, d. 1641, London)

.

반 다이크 [Van Dyck, Anthony, 1599.3.22~1641.12.9]

플랑드르(벨기에)의 화가. 안트베르펜 출생. 1615∼1620년 P.P.루벤스에게

사사하여 그 조수가 되었다. 1621년 영국으로 건너가서 제임스 1세를 위하여

그림을 그리고 1622년 이탈리아로 건너가서는 V.티치아노, P.베로네세 등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그 뒤 로마에서 추기경 벤티보료의 초상을 그리고,

피렌체에서는 몬테 카발로성당을 위하여 《마기의 예배》

《승천()》 등을 그렸다.

또 1626년 프랑스를 거쳐 귀국한 후

성미카엘성당을 위한 《책형(磔)》(1629),

안트베르펜의 아우구스티노수도회를 위한 《성아우구스티누스》(1628) 등을 그렸다.

이 밖에 플랑드르의 저명한 미술애호가 ·문인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이것들을손수 또는 저명한 판화가들의 손을 빌려 판화로 옮겼다.

1632년 찰스 1세의 초청을 받고 재차 영국으로 가, 궁정의 수석화가가 되어

국왕 일가를 비롯한 궁정인들의 초상을 그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런던에서 죽은 그는 루벤스에 버금가는 플랑드르파()의 대가로,

우미 ·고아한 화풍으로 많은 걸작을 남겼다.

기타 주요작품에 《성고 The Annunciation》 《성모 The Virgin》

《얀보스의 성모 The Jan vos Madonna》 《남자의 초상 Potrait of a Man》

《르나르드와 아르미다》 등이 있다. /naver


Charles l, King of England at the Hunt
1635, Oil on canvas, 266x207cm
Portrait of Prince Charles Louis, Elector Palatine
1641, Oil on canvas, 107x93cm
Diana Cecil, Countess of Oxford
1638, Oil on canvas, 107x86cm
Cornelis van der Geest 1620
Oil on canvas, 37.5x32.5cm
Self-portrait, 1621
Oil on canvas, 82x70cm
Self-portrait, 1625-30
Oil on canvas, 116.5x93.5cm
Charles l of England and Henrietta of France
Oil on canvas,
Portrait of Married Couple
Oil on canvas, 112x131cm
The Wife and Daughter of Colyn de Nole
Oil on canvas, 123x90.5cm
Portrait of Father Jean-Charles della Faille, S.J.
1629, Oil on canvas, 130.8x118.5cm, Brussels
Family Portrait, 1618-20, 113.5x93.5cm, St. Petersberg
Lord John and Lord Bernard Stuart, 1638
Oil on canvas, 238x146cm, London
Golgotha, 1630, Oil on canvas, Ghent
Deposition, 1634, Oil on panel, Munich
안소니 반 다이크(1597∼1641)의 ‘유다의 배신’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마 26: 48)
그림 속에 유다의 배신과 예수님 체포사건 담아
질풍노도의 출렁임 있지만 은빛톤 리듬감 느껴져

이 명화를 직접 만난 것은 미국 미네소타주, 주의 수도에 있는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The Minneapolis Institute of arts)에서 였다.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의 가르침과 선포는 절박하고 두려움마져 느끼게 한다. 유다의 배신으로 인한 체포사건은 어쩌면 테러적 대응이기도 했다. 그들의 행위도 만부당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로 서슬이 퍼렇고 가슴을 서늘케 할 만큼 준엄하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에게 서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했다.(마21:28-32) 그들을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까지 극언을 하고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까지 분노하였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각오하고 준비한자답게 극상품의 나드향유를 머리에 부었는데도 자기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한 것이라 하고 이를 받아들인다 (마26:12).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나 베토벤의 ‘운명’이 연주되듯이 슬프고 처절한 비장미까지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일의 연속선상에서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의 구속사건이 일어난다. 어느 쪽으로 보나 안타깝고 통곡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희생도 가슴 저리지만, 유다는 그렇게 배신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인간적 연민도 없을 수 없다.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마26:47-48)
그 신호를 ‘키스’로 잡았다는 것부터가 위선적이다. 입맞춤이란 제자가 선생에게 보인 정례의 인사였던 터이다. 일단의
소요가 있었으나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고 잡힌자는 예수님
혼자였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동기가 무엇인가 이점이 늘 나의 뇌리를 붙잡는다. 유다는 예수님 열두제자들 중 유일하게 비갈릴리 출신이긴 했다.
두가지 이유는 드러나 있다. 하나는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는 것이고(눅22:3), 다른 하나는 돈에 대한 탐욕(막14:10-11)으로 지적 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학자들은 유다가 예수님의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로 하여금 메시아로서의 그의 힘을 보여 주기를 원했다고 보기도 한다. 또는 유다는 현세적 통치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대 했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실망하여 예수를 팔기로 결심했으리라는 추론이다.
성경에서 거시적으로 보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전체적
구속구도, 구약(사53:12)의 예언을 완성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로 본다(마27:3-10, 행1:16-20).
그러면 유다는 대구도 속의 희생자로 어떻게 보면 무고한자
인가? 여기서 유다의 책임,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스스로 결심할 자유의지가 부여되어있다. 예수님의 경고와 예수님 체포사건사이에는 충분히 마음을 돌릴만한 기회가 있었다. 유월절 전날의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중의 한사람이 자기를 팔리라고 했고, 나와함께 그릇에 손 넣은 자가 그 라고까지 직접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마치 아담이 끝내 선악과를 취한 것과 같다.
반 다이크 (Anthony Van Dyck)의 ‘유다의 배신’은 전체분위기가 질풍노도 같은 큰 출렁임이 있다. 유다가 중심부에 망토를 걸치고 중앙을 뒤흔들고 있으며 애수에 찬 예수님은 침착 순응적이다. 횃불은 불안하게 이 산골에 날름거리는데 매려는
밧줄, 덮치는 자 막는자들의 긴장이 팽팽하다. 좌하단의 붙잡고 넘어뜨려 귀를 벤 베드로의 밑에 깔린 말고는 붉게 그려져 악마를 상징케 한다.
앤트워프 출신 작가 다이크는 그 시대의 스타 화가 루벤스
때문에 그늘에 가려져 콤플렉스가 있었다. 하지만 루벤스와
티티안의 영향을 짙게 받은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은혜스런 분위기가 짙고 은빛톤으로 리듬감을 느끼게 한다.
그는 바로크 궁정 초상화의 창시자이지만 그의 그림에는
로코코시대의 예감을 또한 담고 있다.
유다는 은 30량에 예수님을 팔고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의도이던 아니던 자신이 예수님을 팔고 있지는 않은지…. 유다는 오늘에도 우리사이에 우리 안에 남아 있다.
이석우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역사문화연구소장)

The Capture of Christ, 1618-20, Oil on canvas, 344x249cm, Madrid


Temple of Silence - Deuter

[출처]

DYCK, Sir Anthony Van
(b. 1599, Antwerpen, d. 1641,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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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다이크 [Van Dyck, Anthony, 1599.3.22~1641.12.9]

플랑드르(벨기에)의 화가. 안트베르펜 출생. 1615∼1620년 P.P.루벤스에게

사사하여 그 조수가 되었다. 1621년 영국으로 건너가서 제임스 1세를 위하여

그림을 그리고 1622년 이탈리아로 건너가서는 V.티치아노, P.베로네세 등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그 뒤 로마에서 추기경 벤티보료의 초상을 그리고,

피렌체에서는 몬테 카발로성당을 위하여 《마기의 예배》

《승천()》 등을 그렸다.

또 1626년 프랑스를 거쳐 귀국한 후

성미카엘성당을 위한 《책형(磔)》(1629),

안트베르펜의 아우구스티노수도회를 위한 《성아우구스티누스》(1628) 등을 그렸다.

이 밖에 플랑드르의 저명한 미술애호가 ·문인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이것들을손수 또는 저명한 판화가들의 손을 빌려 판화로 옮겼다.

1632년 찰스 1세의 초청을 받고 재차 영국으로 가, 궁정의 수석화가가 되어

국왕 일가를 비롯한 궁정인들의 초상을 그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런던에서 죽은 그는 루벤스에 버금가는 플랑드르파()의 대가로,

우미 ·고아한 화풍으로 많은 걸작을 남겼다.

기타 주요작품에 《성고 The Annunciation》 《성모 The Virgin》

《얀보스의 성모 The Jan vos Madonna》 《남자의 초상 Potrait of a Man》

《르나르드와 아르미다》 등이 있다. /naver


Charles l, King of England at the Hunt
1635, Oil on canvas, 266x207cm
Portrait of Prince Charles Louis, Elector Palatine
1641, Oil on canvas, 107x93cm
Diana Cecil, Countess of Oxford
1638, Oil on canvas, 107x86cm
Cornelis van der Geest 1620
Oil on canvas, 37.5x32.5cm
Self-portrait, 1621
Oil on canvas, 82x70cm
Self-portrait, 1625-30
Oil on canvas, 116.5x93.5cm

Charles l of England and Henrietta of France
Oil on canvas,
Portrait of Married Couple
Oil on canvas, 112x131cm
The Wife and Daughter of Colyn de Nole
Oil on canvas, 123x90.5cm
Portrait of Father Jean-Charles della Faille, S.J.
1629, Oil on canvas, 130.8x118.5cm, Brussels
Family Portrait, 1618-20, 113.5x93.5cm, St. Petersberg
Lord John and Lord Bernard Stuart, 1638
Oil on canvas, 238x146cm, London
Golgotha, 1630, Oil on canvas, Ghent
Deposition, 1634, Oil on panel, Munich
안소니 반 다이크(1597∼1641)의 ‘유다의 배신’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마 26: 48)
그림 속에 유다의 배신과 예수님 체포사건 담아
질풍노도의 출렁임 있지만 은빛톤 리듬감 느껴져

이 명화를 직접 만난 것은 미국 미네소타주, 주의 수도에 있는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The Minneapolis Institute of arts)에서 였다.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의 가르침과 선포는 절박하고 두려움마져 느끼게 한다. 유다의 배신으로 인한 체포사건은 어쩌면 테러적 대응이기도 했다. 그들의 행위도 만부당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로 서슬이 퍼렇고 가슴을 서늘케 할 만큼 준엄하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에게 서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했다.(마21:28-32) 그들을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까지 극언을 하고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까지 분노하였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각오하고 준비한자답게 극상품의 나드향유를 머리에 부었는데도 자기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한 것이라 하고 이를 받아들인다 (마26:12).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나 베토벤의 ‘운명’이 연주되듯이 슬프고 처절한 비장미까지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일의 연속선상에서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의 구속사건이 일어난다. 어느 쪽으로 보나 안타깝고 통곡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희생도 가슴 저리지만, 유다는 그렇게 배신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인간적 연민도 없을 수 없다.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마26:47-48)
그 신호를 ‘키스’로 잡았다는 것부터가 위선적이다. 입맞춤이란 제자가 선생에게 보인 정례의 인사였던 터이다. 일단의
소요가 있었으나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고 잡힌자는 예수님
혼자였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동기가 무엇인가 이점이 늘 나의 뇌리를 붙잡는다. 유다는 예수님 열두제자들 중 유일하게 비갈릴리 출신이긴 했다.
두가지 이유는 드러나 있다. 하나는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는 것이고(눅22:3), 다른 하나는 돈에 대한 탐욕(막14:10-11)으로 지적 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학자들은 유다가 예수님의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로 하여금 메시아로서의 그의 힘을 보여 주기를 원했다고 보기도 한다. 또는 유다는 현세적 통치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대 했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실망하여 예수를 팔기로 결심했으리라는 추론이다.
성경에서 거시적으로 보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전체적
구속구도, 구약(사53:12)의 예언을 완성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로 본다(마27:3-10, 행1:16-20).
그러면 유다는 대구도 속의 희생자로 어떻게 보면 무고한자
인가? 여기서 유다의 책임,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스스로 결심할 자유의지가 부여되어있다. 예수님의 경고와 예수님 체포사건사이에는 충분히 마음을 돌릴만한 기회가 있었다. 유월절 전날의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중의 한사람이 자기를 팔리라고 했고, 나와함께 그릇에 손 넣은 자가 그 라고까지 직접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마치 아담이 끝내 선악과를 취한 것과 같다.
반 다이크 (Anthony Van Dyck)의 ‘유다의 배신’은 전체분위기가 질풍노도 같은 큰 출렁임이 있다. 유다가 중심부에 망토를 걸치고 중앙을 뒤흔들고 있으며 애수에 찬 예수님은 침착 순응적이다. 횃불은 불안하게 이 산골에 날름거리는데 매려는
밧줄, 덮치는 자 막는자들의 긴장이 팽팽하다. 좌하단의 붙잡고 넘어뜨려 귀를 벤 베드로의 밑에 깔린 말고는 붉게 그려져 악마를 상징케 한다.
앤트워프 출신 작가 다이크는 그 시대의 스타 화가 루벤스
때문에 그늘에 가려져 콤플렉스가 있었다. 하지만 루벤스와
티티안의 영향을 짙게 받은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은혜스런 분위기가 짙고 은빛톤으로 리듬감을 느끼게 한다.
그는 바로크 궁정 초상화의 창시자이지만 그의 그림에는
로코코시대의 예감을 또한 담고 있다.
유다는 은 30량에 예수님을 팔고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의도이던 아니던 자신이 예수님을 팔고 있지는 않은지…. 유다는 오늘에도 우리사이에 우리 안에 남아 있다.
이석우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역사문화연구소장)

The Capture of Christ, 1618-20, Oil on canvas, 344x249cm, Madrid


Temple of Silence - Deuter

Posted by 김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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