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이름 석자 돌멩이 때문에... (제공:운봉)
노무현 평양 표지석 소동과 봉하마을 잔치판, 불탄 숭례문


이문호 편집위원 (전 연합뉴스 전무)

노무현 대통령이 작년 10월 평양 정상회담을 기념한답시고 나무를 심은 것까진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놈의 이름 석자 새긴 돌맹이 하나 때문에 대한민국 대통령과 그 밑의 국정원장이라는 부하가 인간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덩달아 대한민국까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정말 참기 힘들다. 그렇지 않아도 봉하마을과 숭례문 때문에 흉흉하던 民心은 지금 평양 표지석 소동을 언급하면서 “미친...나쁜...”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내뱉는 지경이 됐다.

▲ 작년 12월 18일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이 평양을 방문해 10월 2~4일 개최된 2차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표지석. 정상회담 당시 정부가 준비해 간 250㎏짜리 돌보다 무게가 가벼운 75㎏짜리로 줄었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명의도 빠져 있다.

▲ 작년 10월 평양 중앙식물원에 설치하려고 했다가 그냥 가져온 250㎏짜리 표지석. /청와대 제공

워낙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사람들이 오리발 내밀다 들통 나면 은근슬쩍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고 넘기려는 통에 나름대로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선 수사기관이라도 나서야할 판이지만 그냥 신문들이 전하는 말을 더듬어 유추해보면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지 않을까.

오매불망 그렇게 갈망하던 평양엘 가게 됐다, 남북정상회담 못하고 끝내나 했는데 임기말에 드디어 한건 하는구나, 전임자 김대중처럼 노벨평화상은 타지 못할망정 이게 어디냐, 나라 위신이고 개인 체면이고 그런 건 다 내다버려라, 별놈의 보수인가 하는 작자들이 뭐라 하면 “민족의 대사 앞에 아직도 그런 작태를 논하느냐” 한마디 하면 된다, 그래도 내 이름 석자 하나는 평양 땅에 영구히 남겨야 하지 않겠나, 그렇지 않아도 워낙 한 게 없다고 잃어버린 10년이니 뭐니 난리들 피우지 않는가. 그런데 뭐가 좋겠나,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名山의 널찍한 바위에 큼지막하게 글씨를 새기면 제일 좋으련만 그게 가능하겠나, 옳거니, 나무 하나 심고 그 옆에 표지석 세우면 자연스럽게 목적 달성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난색을 표하는 북한 사람들 달래 250kg 이나 하는 돌맹이에 근사하게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새겨 들고 갔는데 그게 그만 북쪽 사람들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그냥 가져오고 말았다. 다시 교섭 끝에 겨우 OK 사인을 받아 국정원장이란 사람이 막중한 대선 전날 새로 만든 표지석을 들고 가 설치하고 온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놈의 언론 때문에 만천하에 들어나고 말았고 구차한 행적을 숨기려 거짓말을 하다 그 거짓말이 또 들통 나고...자기합리화를 하려고 대화록이란 걸 유출한 국정원장은 사표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는데 덜렁 목을 자르기도 뭐해서 미적거리다 사표를 수리했고...

어디 국정원장이 택배 배달부 노릇만 했겠나, 대선을 소재로 대한민국 정보 수장의 얘기 보따리들도 털어놔야 그나마 대접을 받을 것 아닌가...아프간 인질 사태 때처럼 원래 나설 데 안 나설 데 가리지 않는 양반이니 어련하셨겠나...대충 이런 스토리가 엮어지는데 오죽하면 국정원장이 표지석 문제로 대선 전날 평양엘 갔다 왔다니까 사람들이 “에이, 설마 그깐 일로 국정원장이...” 하며 믿지 않았을 정도로 요상한 줄거리지만 불행하게도 맞는 얘기 아닌가 싶다.

그 놈의 이름 석자가 뭐라고 국민 눈을 속여 가며 돌덩이를 평양까지 싣고 가고 국정원장이란 사람이 표지석 설치문제로 왔다 갔다 했다. 그 과정에 들어간 국민세금은 또 얼마인가. 그처럼 ‘깜도 안 되는 일’로 평양을 들락거린 국정원장이나 시킨 사람이나 “진짜 세금폭탄 아직도 멀었다”고 국민을 협박하면서도 막상 자기들은 세금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써댄 꼴이다.

그런데 처음 가져갔다는 것은 멋스런 자연석에 근사하고 당당하게 새긴 글씨가 그럴싸한데 나중에 바꾼 묘비석 같은 건 크기도 확 줄어든 초라한 몰골에 당당함도 사라져 어쩐지 보기에 좀 민망하다. “하나된 민족의 염원을 담아, 2007년 10월 평양,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과 “하나된 민족의 염원을 담아, 2007. 10.2-4. 평양 방문기념,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이라는 글은 얼핏 보면 그거나 그거나다.

결국 가운데의 ‘2007년 10월 평양’이 ‘2007.10.2-4. 평양 방문기념’으로 바뀌어져 있다. 그게 그 말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전자는 “내가 왔노라, 평양을 보았노라, 그래서 여기에 징표를 남기노라” 하는 식으로 제법 의젓하다. 김일성과 김정일 이외에는 감히 누구도 내노라 하고 나설 수 없는 체제에 익숙한 북한 사람들이 보기에 따라서는 “뭐야 이거, 저희들이 평양을 점령이라도 했단 말이야. 수령님처럼 행세하려 들다니”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거기에 비해 후자는 그저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이란 사람이 허락을 받아 평양을 잘 구경하고 갑니다. 그 영광스러움과 황공함을 기념하기 위해 이 표지석을 세웁니다” 라는 정도의 뉘앙스가 읽혀진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사람들은 대통령 생가가 있는 봉하라는 조그만 마을에 주변 경관과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는, 생뚱맞은 호화 주택을 짓고 인근에 혈세 500억원을 들여 이런저런 시설을 짓겠다는 그런 마음가짐이 정신 나간 짓이라며 개탄하고 있다. 이렇게 국민의 공분을 사다가 앞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그곳에서 마음 편하게 퇴임 후를 보낼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사람들도 많다.

숭례문 방화범 채종기는 15일 현장검증하면서 "억울한 게 뭐냐"는 질문에 “노무현 대통령 책임이에요. 임금이 국민을 버리는데…약자를 배려하는 게 대통령 아닙니까. 진정을 세 번이나 해도 안 됐어요. 순간적인 감정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나 하나 때문에 국민이 사랑하는 문화재가 없어져버렸으니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래도 인명피해는 없었잖아요. 문화재는 복원하면 됩니다.”고 말했다. 그의 뻔뻔함에 치가 떨리면서도 씁쓸한 失笑를 금할 수 없게 만드는 건 바로 노무현 대통령 자신의 자업자득이 아닐까.

사람들이 숭례문 소실을 안타까워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치 나라를 잃은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함과 분노를 느끼는 건 또 다른 측면에서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범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문화재를 방치했던 처지에 돌아가 살 집 짓느라 여념이 없고 무슨 대단한 일 했다고 평양에 이름 새긴 돌덩어리를 싣고 가 퇴짜 맞고 그 소동을 벌이는 대통령에 대한 울분의 표출이기도 한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은 내팽개치면서 여차하면 북한에서 얼마든지 부셔버릴 수 있는 돌덩이에 새긴 이름 석자 때문에 국정원장을 머슴 부리듯 한 대통령은 서울엔 집이 없어 25일 하룻밤을 청와대에서 더 묵겠다고 한다. 그럴 수 있겠다 싶다가도 “서울에 두 사람 잠잘 공간이 없나, 그 많은 친구와 노사모들은 다 어디 갔나, 서울엔 깨끗한 여관도 있고 호텔도 많은데 그런 데서 자면 어디 덧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표지석 소동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들어난 청와대 대변인의 거짓말이란 것도 국정원장이 한 달 전에 일부러 특정 언론에 흘린 바로 그 사진으로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니 이건 도대체 코미디인가 비극인가. (끝)

Posted by 김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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