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福田.突然 辭任. 後任 浮上 아소(麻生) 有望 ▲
◆“創氏改名도 强制徵用도 없었다”妄言한者
▲ 麻生太郞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내각 총리대신의 전격적인 사임 후
차기 일본 총리소 사실상 내정된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간사
장은, 부친이 과거 일제 강점기 말에 조선인 1만여 명을 강제 징용
한 인물로 알려졌다.
이는 아소 간사장이 그간 해온 “창씨 개명은 조선인들이 자발적으
로 원해서 한 것”·“강제 징용은 없었다” 등의 망언과 더불어
한-일 간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정치 명문가로 인정받는 아소의 가문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정·재계로 진출해왔다. 그의 가문은 일본 후쿠
오카현에 본거지를 둔 ‘아소 그룹’이란 대표적 족벌 기업으로
유명하다.
문제는 그가 족벌기업이나 정치 명문가 출신이라는 게 아니라, 그의
부친인 아소 다카키치(麻生太賀吉)의 추악한 과거다.
아소 다카키치는 일제 강점기에 1만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 징용해,
강제 노역을 시킨 규슈의 ‘아소탄광’의 소유자였다.
아소 다카키치는 당시 사실상의 ‘무임금’으로 조선인 광부들을
착취했고 참다 못한 조선인 광부들이 집단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아소탄광에 끌려온 조선인 광부 1만여 명 중 절반이 넘는 5천여
명이 작업 중 사망하거나 일본인 현장 감독의 구타와 굶주림, 그리
고 중노동 등으로 사망하거나 도망쳤다.
이것도 모자라 아소 다카키치의 아소탄광은 빈사 상태에 빠진 조선인
노동자를 산채로 생매장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 정가에서는 아소가 그동안 발언해온 “강제 징용은 없었다”는
등의 망언의 배후로 아소 집안의 추악한 조선인 집안 착취사를 들고
있을 정도다.
그는 지난 1979년 일본 정계에 입문해 1996년 자민당 부간사장 등을
거쳐 2003년에는 총무대신, 2005년 외무대신을 거쳐 지난 8월 당정
개편 시 자민당 간사장에 선출됐다.
그는 2001년부터 총리 선거 때마다 입후보해 3번이나 고배를 마신
삼수생이기도 하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에는 큰 표
차이로 졌고 2004년에는 아베 신조 전 총리에게, 지난해 9월에는
후쿠다 야스오 총리에 패했다.
한편 지난 2007년 9월 25일 취임 이후 낮은 지지율과 국민들의 무관
심, 그리고 일본 집권 자민당 내의 파벌 다툼으로 인해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 왔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내각 총리대신이
1일 밤 총리직 사임 의사를 밝혔다. 내각 출범 후 1년만의 일이다.
후쿠다 이날 일본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
을 전격 발표했다.
후쿠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만약 국민 생활을 우선적으로 고려하
지 않는다면 정치적 공백 또는 정치적 쇠퇴를 막을 수 없다”며
“정책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체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사임 이유를 둘러댔다.
후쿠다 총리는 특히 “현 시점에서 사임을 선택한 것이 무책임하게
보일 순 있겠지만 임시국회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선 지금 사퇴하
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며 양원제 국가의 상원에 해당하는
일본의 참의원을 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야당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
사임의 직접적인 이유임을 시사했다.
지난해 9월 아베 신조 전 총리에 이어 높은 지지율로 총리직에 오른
후쿠다 총리는 이후 휘발유세 인상, 연금기록 분실 및 일본 방위성의
뇌물 비리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로 지지율이 급격하게 추락해 급기야
20%대까지 떨어지는 ‘식물 총리’로 전락했다.
게다가 가을 임시국회를 앞두고 공동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공명당과
의 불화 등으로 극한적 혼란이 예상되자 퇴진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심지어 집권 자민당 내에서도 “후쿠다 총리로는 차기 중의원 선거에
서 승리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데일리안 유성호 기자=- Copyrights
◆“創氏改名도 强制徵用도 없었다”妄言한者
▲ 麻生太郞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내각 총리대신의 전격적인 사임 후
차기 일본 총리소 사실상 내정된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간사
장은, 부친이 과거 일제 강점기 말에 조선인 1만여 명을 강제 징용
한 인물로 알려졌다.
이는 아소 간사장이 그간 해온 “창씨 개명은 조선인들이 자발적으
로 원해서 한 것”·“강제 징용은 없었다” 등의 망언과 더불어
한-일 간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정치 명문가로 인정받는 아소의 가문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정·재계로 진출해왔다. 그의 가문은 일본 후쿠
오카현에 본거지를 둔 ‘아소 그룹’이란 대표적 족벌 기업으로
유명하다.
문제는 그가 족벌기업이나 정치 명문가 출신이라는 게 아니라, 그의
부친인 아소 다카키치(麻生太賀吉)의 추악한 과거다.
아소 다카키치는 일제 강점기에 1만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 징용해,
강제 노역을 시킨 규슈의 ‘아소탄광’의 소유자였다.
아소 다카키치는 당시 사실상의 ‘무임금’으로 조선인 광부들을
착취했고 참다 못한 조선인 광부들이 집단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아소탄광에 끌려온 조선인 광부 1만여 명 중 절반이 넘는 5천여
명이 작업 중 사망하거나 일본인 현장 감독의 구타와 굶주림, 그리
고 중노동 등으로 사망하거나 도망쳤다.
이것도 모자라 아소 다카키치의 아소탄광은 빈사 상태에 빠진 조선인
노동자를 산채로 생매장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 정가에서는 아소가 그동안 발언해온 “강제 징용은 없었다”는
등의 망언의 배후로 아소 집안의 추악한 조선인 집안 착취사를 들고
있을 정도다.
그는 지난 1979년 일본 정계에 입문해 1996년 자민당 부간사장 등을
거쳐 2003년에는 총무대신, 2005년 외무대신을 거쳐 지난 8월 당정
개편 시 자민당 간사장에 선출됐다.
그는 2001년부터 총리 선거 때마다 입후보해 3번이나 고배를 마신
삼수생이기도 하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에는 큰 표
차이로 졌고 2004년에는 아베 신조 전 총리에게, 지난해 9월에는
후쿠다 야스오 총리에 패했다.
한편 지난 2007년 9월 25일 취임 이후 낮은 지지율과 국민들의 무관
심, 그리고 일본 집권 자민당 내의 파벌 다툼으로 인해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 왔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내각 총리대신이
1일 밤 총리직 사임 의사를 밝혔다. 내각 출범 후 1년만의 일이다.
후쿠다 이날 일본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
을 전격 발표했다.
후쿠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만약 국민 생활을 우선적으로 고려하
지 않는다면 정치적 공백 또는 정치적 쇠퇴를 막을 수 없다”며
“정책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체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사임 이유를 둘러댔다.
후쿠다 총리는 특히 “현 시점에서 사임을 선택한 것이 무책임하게
보일 순 있겠지만 임시국회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선 지금 사퇴하
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며 양원제 국가의 상원에 해당하는
일본의 참의원을 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야당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
사임의 직접적인 이유임을 시사했다.
지난해 9월 아베 신조 전 총리에 이어 높은 지지율로 총리직에 오른
후쿠다 총리는 이후 휘발유세 인상, 연금기록 분실 및 일본 방위성의
뇌물 비리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로 지지율이 급격하게 추락해 급기야
20%대까지 떨어지는 ‘식물 총리’로 전락했다.
게다가 가을 임시국회를 앞두고 공동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공명당과
의 불화 등으로 극한적 혼란이 예상되자 퇴진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심지어 집권 자민당 내에서도 “후쿠다 총리로는 차기 중의원 선거에
서 승리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데일리안 유성호 기자=- Copyr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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